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마도 정벌 (문단 편집) ==== 배경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UmMVeC5aVbg)]}}} || 태조 7년(1398) 1월, 대마도의 사절이 조선을 방문해 조하(朝賀)에 참예한 이래, 대마도에서 파견된 사절단은 거의 매년 조선을 방문해 예물을 바치고 그 대가로 쌀과 콩을 받아갔다. 이들 사절단은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宗貞茂)가 보낸 자들이었고, 왜인 상인들도 이들을 따라가 항구에 돌아다니며 교역했다. 이로 인해 여러 폐단이 발생하자, 조선 조정은 부산포와 내이포에 한해 왜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고, 통행 증명서인 행장(行狀)을 소지한 선박에 한해 기항하게 했다. 또한 태종 18년(1418) 3월 경상도의 염포와 가배량에 왜관을 설치하고 왜인을 분치시켰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태종 대에만 소규모 침략이 60여 차례 있었다. 그나마 소 사다시게는 조선의 요구에 응해 왜선을 가능한 통제하고 왜구를 금하려 노력했으며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 백성들을 돌려보냈기에 조정에서는 그를 괜찮은 인물로 여겼다.[* 태종 7년(1407)엔 대마도 주민들을 울릉도에 옮겨 살게 하고 싶다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조정에서는 일본의 반발이 있을 것을 우려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 사다시게가 사망한 뒤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뒤를 이었는데, 이 시기에 기근이 들어 대마도의 생활이 궁핍해지자 다시 왜구가 활개를 쳐 조선과 명나라를 향한 약탈 행렬이 이어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소 사다모리에게 왜구를 제어할 것을 요구했지만, 당시 대마도의 실권은 왜구의 두목이자 소다만호(早田萬戶)인 사에몬타로(左衛門太郞)가 장악하고 있어서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세종 1년(1419) 5월 초, 왜선 39척이 비인현 도두음곶을 침략했다. 그들은 조선 병선 7척을 탈취하여 불사르고 많은 조선 병사들을 살육했으며, 만호 김성길은 창에 찔려 물에 떨어졌다가 겨우 헤엄쳐서 살았고, 아들 김윤은 아버지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여기고 "아비가 이미 물에 떨어져 죽었으니, 내가 어찌 혼자 싸우다가 적의 손에 죽으리오."라며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후 왜구는 이긴 기세를 타고 육지에 올라 비인 현감 송호생의 군대를 격파하고 송호생이 달아난 성을 포위해 거의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이면서 성 밖에 있는 민가의 닭과 개를 노략해 거의 다 없어지게 했다. 이에 지서천군사 김윤과 남포진 병마사 오익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반격하고 송호생이 성밖으로 나와 협공하자, 왜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또한 5월 12일엔 왜선 7척이 해주를 침략해 약탈을 자행했고, 13일엔 황해도 조전절제사 이사검 등이 병선 5척으로 왜구를 토벌하러 갔다가 해주 연평곶에서 적선 38척에게 포위되었다. 이때 왜구들은 이사검 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조선을 치러 온 것이 아니라, 본래 중국을 향하여 가려고 했으나 마침 양식이 떨어졌으므로 여기에 왔노라. 만일 우리에게 양식을 주면 우리는 곧 물러가겠으며, 전일에 도두음곶에서 싸움한 것은 우리가 먼저 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대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들을 하수(下手)하기에 부득이 응했을 뿐이다. 이에 이사검이 사람을 보내 쌀 5섬과 술 10병을 줬으나, 왜구는 도리어 보낸 사람을 잡고 양식을 더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사검은 진무(鎭撫) 2인과 선군(船軍) 1인을 보내어 쌀 40섬을 주었으나, 왜구는 이속과 진무는 돌려보냈지만 선군을 잡아두고 이시검과 대치했다. 이에 태종과 세종은 근심하며 대호군 김효성을 경기, 황해도 조전 병마사에, 예빈 소윤 장우량을 황해도 경차관으로 임명하여 각기 병사를 이끌고 해주로 파견했다. 또한 태종과 세종은 박은, 이원 및 조말생과 이명덕을 대궐로 불러 왜구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 세종이 말했다. >각도와 각 포구에 비록 병선은 있으나, 그 수가 많지 않고 방어가 허술하여, 혹 뜻밖의 변을 당하면, 적에 대항하지 못하고 도리어, 변환(邊患)을 일으키게 될까 하여, 이제 전함(戰艦)을 두는 것을 폐지하고 육지만을 지키고자 한다. 판부사 이종무와 찬성사 정역 등이 반대했다. >우리나라는 바다에 접해 있으니, 전함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전함이 없으면, 어찌 편안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지강도 반대했다. >고려 말년에 왜적이 침노하여 경기까지 이르렀으나, 전함을 둔 후에야 국가가 편안했고, 백성이 안도했나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사검이 왜구에게 협박하여 식량을 내줬으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왜적은 병선이 많이 모이면 약한 틈을 치러 할 것이다." 하며 여전히 수군의 효용성을 의심했다. 반면, 태종은 유정현, 박은, 이원, 허조 등을 불러 왜구가 중국으로 치러 간 틈을 타 대마도를 치는 게 어떤지 물었다. 이에 신하들이 대마도를 치는 건 위험하니 적들이 귀환할 때를 노려 역습하자고 제의하자, 태종은 단호하게 답했다. >만일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한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허술한 틈을 타서 쳐부수는 것만 같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처자식을 잡아 오고, 우리 군사는 거제도에 물러 있다가 적이 돌아옴을 기다려서 요격하여, 그 배를 빼앗아 불사르고, 장사하러 온 자와 배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구류(拘留)하고, 만일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베어버리고, 구주(九州)에서 온 왜인만은 구류하여 경동(驚動)하는 일이 없게 하라. 또 우리가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은 불가하니, 후일의 환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 이후 태종은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임명해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 이숙묘, 황상을 중군 절제사로, 유습을 좌군 도절제사로, 박초, 박실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 [[이순몽]]을 우군 절제사로 삼게 했으며, 경상, 전라, 충청의 3도 병선 2백 척과 배를 타는 데 능숙한 병사들을 이끌고 6월 8일에 견내량에 집결하여 대마도 정벌을 준비하게 했다.또한 영의정 유정현을 3군도통사로 삼아 경상도에 가서 이를 총감독하게 했다. 이리하여 제3차 대마도 정벌의 막이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